기획특집

침묵과 향수의 정치: 탄광·폐광촌에 남은 구조적 폭력의 감정지형*

이혜수 1 , **
Hyesoo Lee 1 ,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이혜수_강원대학교 사회통합연구센터 연구교수(cleehs@gmail.com)
1Kangwon National University
**Corresponding Author : cleehs@gmail.com

© Copyright 2026, The Law Research Institut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Mar 12, 2026; Revised: Mar 20, 2026; Accepted: Mar 25, 2026

Published Online: Mar 31, 2026

국문초록

본 연구는 영미권과 한국의 미디어 콘텐츠에 나타나는 탄광·폐광촌 재현을 비교함으로써, 산업적 쇠퇴가 구조적 폭력으로 작동할 때 어떠한 감정의 형태로 사회적으로 조직되는가를 정동 레짐(affective regimes)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영미권 콘텐츠에서 탄광은 분노와 저항, 성찰적 향수가 공존하며 장기간에 걸쳐 변형되는 정동 레짐 속에서 재현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동은 명확한 정치적 대상을 향한 지향성(orientation)을 유지하며 공적 영역과의 연결을 지속한다. 반면, 한국 콘텐츠에서 나타나는 탄광의 재현은 정동이 집단적 정치성으로 조직되기 이전에 침묵과 체념, 사사화(privatization), 그리고 풍경으로의 고착으로 이행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본 연구는 이러한 차이를 압축된 정동 레짐(compressed affective regime)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는 탈산업화가 한 세대 안에 압축적으로 진행되면서, 구조적 폭력이 저항의 대상으로 조직되지 못한 채 개인의 삶과 공간 속으로 내면화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본 연구는 탈산업화 연구에서 정동을 핵심 분석 범주로 제시하며, 구조적 폭력이 감정과 기억의 형태로 이동하는 궤적과 그것이 장소와 권력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재구성되는지를 설명하는 비판적 분석 틀을 제안하고자 하였다.

Abstract

This study offers a comparative analysis of representations of coal mining and post-mining communities in Anglophone and South Korean media. It examines how industrial decline operates as structural violence and how it is socially organized into distinct affective forms through the lens of “affective regimes.”

The findings show that Anglophone media represent coal mining within an affective regime in which anger, resistance, and reflective nostalgia coexist and evolve over an extended period. Within this framework, affect maintains its orientation toward identifiable political targets, thereby sustaining its connection to the public sphere. In contrast, South Korean media depict a trajectory in which affect is subsumed into silence, resignation, and privatization, becoming fixed within the landscape before it can be mobilized into collective political action.

This study conceptualizes this pattern as a “compressed affective regime,” in which rapid deindustrialization leads structural violence to be internalized within individual lives and spaces, preventing it from being constituted as an object of resistance.

By doing so, the study positions affect as a central analytical category in deindustrialization studies and proposes a critical framework for understanding how structural violence is reconfigured into forms of emotion and memory within the dynamics of place and power.

Keywords: 정동 레짐; 구조적 폭력; 탈산업화; 폐광촌; 지향성
Keywords: Affective Regime; Structural Violence; Deindustrialization; Post-Mining Communities; Orientation

I. 서론

탄광과 폐광촌은 국가 주도적 산업화 과정을 통한 지역 공동체의 형성과 해체가 가장 밀도 높게 응축된 장소로서 그동안 사회학 및 문화연구에서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다루어져 왔다. 이 공간들은 단순한 산업 유산이 아니라, 사회가 특정 노동자 집단과 지역을 어떻게 형성하고 해체하는가를 보여주며, 구조적 폭력이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어떻게 흔적을 남기는지 드러내 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탈산업화 과정에서 탄광촌이 ‘버려진 공간’으로 전환되는 구조적 폭력은 비단 물리적 위험이나 고용 상실로만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구조조정으로 인한 생계 기반의 상실과 지역 붕괴는 분노, 침묵, 체념, 향수, 애도와 같은 다양한 정동적 형태로 개인과 공동체에 각인된다. 그리고 미디어는 이러한 정동을 기록하고 증폭시키며, 대중에게 전시함으로써 특정한 감정 양식을 레짐으로 전환하는 데에 일조한다. 즉 탄광 및 폐광촌을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들은 단순한 역사 재현이 아니라 산업적 폭력이 사회적으로 어떤 감정으로 전환되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적 장치라 할 수 있다.

탄광촌과 관련된 산업적 폭력은 단발적인 사건이나 물리적 가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조건이 특정 집단의 삶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침식하는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이 된다. 이러한 폭력은 외부의 억압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실, 수치, 침묵, 향수와 같은 감정의 형태로 일상 속에 체화되고 재생산된다. 다시 말해 폭력은 감정과 기억을 통해 계속해서 살아남는 사회적 조건이 된다. 이러한 관점은 감성연구가 폭력 연구와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을 잘 보여줄 수 있다고 본다.

본 논문은 영미권과 한국의 탄광 재현을 비교하여, 탄광과 폐광촌이 미디어를 통해 산업적 폭력의 공간에서 정동적 기억의 장소로 전환되는 과정을 ‘정동 레짐(affective regimes)’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정동 레짐은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조건 하에서 어떤 감정들이 정당하고 가능하며 공유될 수 있는가를 규정하는 감정의 구조이다. 동일한 산업 쇠퇴의 경험이라 해도, 그것이 분노와 저항으로 표출될 수도 있고 침묵과 향수로 고착될 수도 있다면, 그 차이는 개인의 심리나 문화적 기질이 아니라 정동 레짐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다.

본 연구는 영미권의 1940–70년대 미디어에서 탄광이 노동의 기억을 둘러싼 분노와 성찰적 향수의 장소로 재현된 것과, 한국의 미디어에서 그와 유사한 정동이 1990년대 이후에, 저항보다는 침묵과 애도의 형태로 나타난 것에 주목하는데, 이러한 차이가 문화적 특성의 문제가 아니라 탈산업화가 각 사회에서 상이한 정치적 조건 속에서 경험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했다.

그동안 폐광촌을 다룬 기존 연구들은 주로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 산업유산의 시각화에 집중한 연구들이 많았다. Lee(2019)는 사북사건 이후 탄광소설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의 의미화 과정을 추적했으며, Kim(2023)은 산업화 시기 탄광 노동의 정동을 모빌리티 관점에서 재검토했다. 또한 Han(2004)Shin(2018)은 탄광촌의 공간 재현과 기억의 정치를 문학지리학적 관점에서 연구하였고, Jeong(2023)은 공립석탄박물관의 기억 재현이 어떻게 ‘낭만화된 가난’과 ‘대상화된 노동’으로 전환되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또한 Park(2023)은 화순탄광사건의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억압된 역사적 기억의 소환을 분석하였으며, Lee(2015)는 감정 구조론, Kim(2011)은 기억 이론을 통해 탄광이 어떻게 개인적·집단적 감정으로 내면화되는지를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선행 연구들은 탄광을 역사적 기억의 장소이자 정동의 영역으로 조명해 왔으나, 다만 주로 국가적·지역적 맥락 내 기억의 정치와 감정 구조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본 연구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어떤 사회에서는 분노와 저항의 공간인 탄광이 다른 사회에서는 침묵과 향수의 공간으로 재현되는가를 비교 설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에 따라 본 논문은 영미권과 한국의 탄광 및 폐광촌 관련 미디어 콘텐츠를 비교 분석하였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How Green Was My Valley, 1941)>, <할란 카운티 USA(Harlan County, USA, 1976)>, <브래스드 오프(Brassed Off, 1996)>와 같은 영미권 작품들과, <그들도 우리처럼(1990)>, <검은 땅의 소녀와(2007)>와 같은 한국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 콘텐츠들이 탄광이라는 공간을 어떠한 감정적 어조와 서사적 틀 속에서 재현하는가를 검토한다. 이 콘텐츠들은 탄광이 ‘현재의 산업’이던 시기로부터 완전히 ‘과거의 유물’로 전환된 시기까지를 포괄하며, 탈산업화가 감정의 지형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비교하기에 적합한 사례들이다. 이 사례들을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의 구조적 감정(structure of feeling) 개념을 중심으로 산업 쇠퇴가 어떤 감정을 가능케 하고 어떤 감정을 억제하는가를 설명하며, 사라 아메드(Sara Ahmed)의 정동 이론을 통해 감정이 특정한 대상과 방향성을 갖는 과정과 방식, 감정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조직되는가를 설명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사회에서 탄광과 폐광촌이 어떠한 정동적 형식으로 재현되는가를 비교분석하고자 한다.

II. 구조적 폭력, 정동, 그리고 기억의 정치

본 연구는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감정 구조(structure of feeling)를 이론적 우산으로 삼아 분석을 진행한다. 감정 구조는 특정한 역사·사회적 조건 속에서 어떤 감정이 가능하고 정당한 것으로 경험되는가를 규정하는 정동의 지층으로, 탈산업화에서 파생되는 구조적 폭력이 서로 다른 사회에서 상이한 감정의 형태로 전환되는지를 비교하기 위한 개념적 틀을 제공한다.

한편 사라 아메드의 정동 이론은 감정 구조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조직되는가를 설명하는 분석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아메드는 감정이 항상 특정한 대상과 방향성을 갖는다고 본다. 감정의 이러한 지향성(orientation)은 사회적 관계와 권력 구조를 반영하는데, 즉 어떤 감정이 발생하는지 뿐만이 아니라 그 감정이 누구를 향하는가가 정동의 정치적 효과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두 이론축을 바탕으로, 산업 쇠퇴라는 조건 속에서 형성된 감정구조와 정동이 특정한 대상과 방향성을 갖는 과정, 그리고 그 방향성이 차단될 때 나타나는 정동의 전환과 고정 과정을 단계적으로 파악한다. 이를 통해 탄광과 폐광촌이라는 구체적 공간에서 구조적 폭력이 감정의 형태로 어떻게 조직되고 재배치되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추가적으로 이러한 ‘정동의 방향화 → 정동의 교착 → 기억과 장소로의 물화’라는 분석 경로를 구체화하는 데에는 로런 벌랜트(Lauren Berlant), 스베틀라나 보임(Svetlana Boym), 피에르 노라(Pierre Nora), 도린 매시(Doreen Massey)의 개념을 추가로 활용한다. 벌랜트의 개념을 통해 정동의 방향성이 차단됨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모순적 교착 상태를 설명할 수 있고, 보임의 개념으로는 그러한 교착이 과거와 기억을 향해 접히는 향수의 형식을 구분할 수 있으며, 노라와 매시의 개념은 이러한 감정이 장소와 기억 속에 물화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 활용된다.

1. 구조적 폭력과 정동의 방향성

윌리엄스(Williams, 1977)는 감정구조를 특정 시대를 관통하는 구체적 사회경험이자 관계의 특질로 파악한다. 이는 고정된 체계가 아니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내의 불완전한 상태이지만, 개인 인식과 사회적 행위에 실질적 힘을 행사할 수 있고 유효한 경계를 설정할 수도 있다.

탄광 노동이 사회적 가치와 집단적 정체성의 핵심으로 자리하던 시기에는 분노와 투쟁은 정당한 감정으로서 승인되지만, 산업이 쇠퇴하고 노동이 주변화 되고 나면 이러한 감정의 구성 방식도 변화할 수 있다. 이 연구는 탄광 재현을 이 감정 구조의 변화 속에서 해석하며, 각 시대의 콘텐츠가 그 시대가 가능케 하는 정동의 형태를 표현한다는 점을 분석한다.

이러한 감정 구조를 토대로 아메드의 개념은 감정 구조가 정치적 힘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구체화할 수 있다. 아메드(Ahmed, 2004)에 따르면 감정은 본래 특정 대상을 향하는 의도성(intentionality)을 지니며, 항상 어떤 것에 ‘대해(about)’ 존재한다. 이러한 감정의 지향성(orientation)은 단순한 내면적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세계를 파악하고 그 안에서 특정 입장을 취하는 것과 관련된다.

아메드는 정동이 ‘무엇을 향해’ 움직이는가에 따라 상이한 정치적 효과를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예컨대 분노는 억압의 원인을 특정 주체나 제도로 지목하면서 집단적 저항으로 전환될 수 있지만, 그 지향성을 상실할 경우 슬픔이나 부끄러움과 같은 감정으로 내면화될 수 있다. 이러한 정동의 문법을 통해 탄광과 폐광촌에서 발생하는 산업적·정책적 폭력에 동반되는 감정의 방향성을 분석할 수 있다. 즉 동일한 구조적 폭력이라 해도 어떤 대상으로 인식되는가에 따라 정동은 다른 방식으로 조직될 수 있으며, 그 지향성이 불분명해지면 감정이 외부로 향하지 못하고 다른 형태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잔인한 낙관주의와 향수의 이중성

아메드가 이야기하듯 감정의 방향성이 차단될 때, 구조적 폭력은 다른 형태의 정동적 상태로 이동하게 된다. 즉 감정은 외부를 향해 조직되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머무르게 되는데, 벌랜트(Berlant, 2011)는 ‘잔인한 낙관주의(cruel optimism)’라는 개념으로 이러한 상태를 개념화한다. 이는 주체가 열망하는 대상이 실제로는 그 주체의 번영에 장애가 될 때 형성되는 관계를 의미한다. 예컨대 탈산업화된 산업 공동체에서 과거의 상태가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지속적으로 매달리는 정동은 이러한 낙관주의의 전형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벌랜트가 강조하듯 이러한 낙관주의는 반드시 낙관적인 기분으로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며, 변화가 오지 않으리라는 예감 속에서 공포, 불안, 갈증과 같은 고통스러운 감각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러한 정동적 교착은 공동체가 구조적 폭력을 직시하고 새로운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것을 방해하며, 감정을 특정 상태에 머물게 만든다.

이러한 정동적 교착은 과거를 향한 감정의 ‘접힘’, 즉 향수(nostalgia)로 이어질 수 있다. 보임(Boym, 2001)에 따르면 향수는 집으로의 복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명상이며,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욕망과 실망을 어떻게 구조화하는가를 보여준다. 보임은 이를 복원적 향수(restorative nostalgia)와 성찰적 향수(reflective nostalgia)로 구분하는데, 복원적 향수는 잃어버린 과거를 초역사적으로 재구축하려 시도하는 반면, 성찰적 향수는 근대성 자체의 모순과 폐허 속에 머물며 갈망과 상실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을 의미한다. 즉 벌랜트와 보임의 논의는 아메드가 설명한 정동의 방향성이 불투명해질 때 정동이 과거의 장소와 기억으로 침전되어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적 고리를 제공한다.

3. 기억, 장소, 그리고 정동의 물화

향수와 애도의 정동이 지속될 때 감정은 결국 특정한 기억의 형태와 물리적 장소 속에 고정되며 물화(reification)되는 과정을 거친다. 노라(Nora, 1989)의 ‘기억의 터(lieux de mémoire)’ 개념은 이러한 정동의 물화를 설명하는 틀을 제공한다. 노라는 기억의 터를 기억이 결정화되고 침전되는 곳으로 설명하는데, 이 장소는 더 이상 살아있는 기억이 아닌 재구성된 과거이다. 이러한 관점은 탈산업화 이후의 탄광촌이 ‘살아있는 산업공간’에서 ‘기억의 장소’로 이동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동시에 이 장소는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광산 폐쇄 이후에도 공동체의 경험과 감정을 지속적으로 재구성하는 장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탈산업화의 정동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변형된 형태로 지속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억의 정치가 지역마다 비대칭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은 매시(Massey, 2015)의 장소 이론을 통해 분석할 수 있다. 매시에 따르면 장소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가 교차하는 장이다. 모든 행위자가 동일한 이동성(mobility)을 갖지 못하고, 이 이동성을 지배하는 권력의 차이 즉 권력의 기하학(power-geometry)이 존재한다. 즉 탈산업화 이후 국가, 자본, 노동, 지역 공동체 간의 관계가 어떻게 재편되느냐에 따라 정동의 형태 역시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다.

결국 정동, 향수, 기억, 그리고 장소는 독립된 범주가 아니라 구조적 폭력이 경험되고 재현되는 방식을 조직하는 복합적인 체계로 작동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이론적 토대를 바탕으로 영미권과 한국의 미디어 콘텐츠 사례를 비교함으로써 산업적 폭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향수, 침묵과 애도의 형태로 어떻게 재배치되는가를 분석한다.

III. 영미권 탄광 재현: 구조적 폭력과 정동의 조직

영국과 미국에서 탄광은 오랫동안 단순한 산업 현장을 넘어 노동계급의 정체성과 집단정치가 응축된 공간으로 기능해 왔다. 따라서 영미권의 탄광 재현은 이러한 공간을 사회적 갈등과 연대의 무대로 그려내면서 구조적 폭력이 비교적 명확한 정치적 대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조건을 보여주는 경향성을 띤다. 다시 말해 영미권 작품에서 탄광은 소멸해가는 산업이라는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 저항, 상실의 기억이 서로 충돌하고 조직되는 정동적 공간으로 재현된다. 전술한 감정 구조와 정동의 방향성이라는 관점에서 이 작품들을 보면, 산업 쇠퇴의 경험이 집단적 감정과 정치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었던 역사적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How Green Was My Valley, 1941), <할란 카운티 USA>(Harlan County, USA, 1976), <브래스드 오프>(Brassed Off, 1996)의 세 작품을 중심으로 영미권에서 탄광의 산업적 폭력이 어떤 정동적 형식으로 재현되는지를 살펴본다. 특히 이 작품들이 탄광을 노동과 공동체의 현재적 공간으로 재현하는 방식에서부터 상실과 기억의 장소로 전환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어떤 변화를 보여주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1. 산업 공동체의 현재와 회고적 시선: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How Green Was My Valley, 1941)>

존 포드(John Ford)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How Green Was My Valley, 1941)>는 20세기 초 웨일스 탄광 마을을 배경으로 탄광 공동체가 산업 공간으로 기능하던 시기를 다루면서도, 이미 지나간 세계에 대한 회고에 정동의 핵심을 두고 있는 작품이다. 성인이 된 주인공 휴(Huw)가 회고하는 내레이션과 함께 현재의 황폐한 풍경에서 과거의 기억으로 진입하는 서사 구조는 탄광촌을 단순히 노동의 현장이 아닌 정동이 투사된 ‘기억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영화 초반부에서 탄광은 노동과 공동체가 긴밀하게 결합된 공간으로 그려진다. “누군가가 노래를 시작하면 밸리 마을 전체가 노래 소리로 가득 했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광부들이 줄지어 걷는 행렬, 다 같이 부르는 노래 소리, 노동자들이 다 함께 탄광의 재를 씻는 장면,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장면은 노동이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 공동체의 리듬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임을 보여준다. 윌리엄스(Williams, 1977)의 관점에서 이는 노동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의 감정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마을에 “모든 임금이 1실링 2펜스 삭감될 것임” 이라는 탄광주의 일방적 통고가 붙으면서 공동체 내부에 균열이 발생한다. 광부들이 집단적으로 항의하고 파업을 조직하는 과정은 탄광을 둘러싼 감정이 단순한 상실감이 아니라 명확한 대상과 관계를 지닌 분노로 조직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영화 속에서 임금 삭감을 둘러싼 갈등은 노동자들의 내부 분열과 가족 안에서의 긴장을 촉발하며, 공동체 전체를 정치적 선택의 장으로 끌어들인다. “열심히 일하면 돈은 받게 되어 있어” 라고 주장하는 아버지와 “돈을 덜 줘도 일하겠다는데 어느 사장이 돈을 주겠어요?”라고 되묻는 아들들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며 충돌하는 장면은 정동의 지향성(orientation)이 구성원들 간에 서로 다르게 조직되는 것을 보여준다. 파업을 주장하는 이들의 분노가 자본과 산업구조라는 대상을 향해 조직되는 반면, 파업을 반대한 휴의 아버지는 공동체 내에서 고립된다. 여기에서 분노는 외부의 권력을 향하는 동시에 내부의 균열을 드러내는 감정으로 작동하며, 이는 집단적 정동이 형성되는 구체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서사 전반을 관통하는 회상은 공동체의 붕괴와 가족의 해체, 그리고 점차 비어가는 마을의 풍경의 상실을 과거의 기억으로 재구성하면서 보여준다. 마지막 부분에서 울려퍼지는 광부들의 합창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 예전 삶의 리듬을 회상하는 장면이 되고, 광산 사고와 가족들의 죽음은 공동체의 붕괴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임을 각인시킨다.

이 작품은 분노와 저항이 조직 가능한 감정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그 감정이 점차 기억과 향수의 형태로 전환되는 과도기를 포착한다. 탄광은 이 시점에서 여전히 현재의 투쟁 공간으로 기능하지만, 동시에 상실을 예감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억의 장소이다. 즉 이 영화는 산업 공동체가 정치적 감정을 조직할 수 있는 조건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조건이 붕괴되어 가는 순간을 정동적으로 포착하며, 서로 다른 감정이 공존하고 전환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2. 분노와 연대의 정치적 지향: <할란 카운티 USA(Harlan County, USA, 1976)>

바바라 코플(Barbara Kopple)의 다큐멘터리 <할란 카운티 USA>는 앞 절에서 분석한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 예견되었던 공동체의 해체 위기가 실존적 위협으로 닥친 시기를 배경으로, 구조적 폭력이 어떻게 명확한 대상을 향한 정치적 분노로 조직되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1973년 켄터키주 브룩사이드 탄광 파업을 기록한 이 영화는 정동이 단순한 개인적 고통을 넘어 어떻게 사회적 저항의 동력이 되는지를 포착한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1930년대 ‘할란 카운티 투쟁’ 당시 저항가요를 만든 플로렌스 리스가 노조 집회에 등장해 직접 ‘Which Side Are You On?’ 을 부르는 장면이다. 70대가 된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는 윌리엄스가 말하는 감정 구조의 역사적 지속성을 시각화한다. 40년 전의 투쟁가가 현재의 파업 현장에서 다시 같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정동이 일회성 폭발에 그치지 않고 세대를 가로질러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유효한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메드(2004)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은 감정의 지향성이 어떠한 정치적 효과를 만드는지 보여준다. 파업 도중 광부 로렌스 존스가 구사대의 총격으로 사망하고 카메라가 바닥에 흩어진 뇌수를 직접적으로 비추는 장면은 구조적 폭력의 잔인함을 충격적으로 가시화한다. 이 비극 앞에서 공동체의 슬픔은 체념으로 침전되는 대신 가해 주체인 자본을 향한 분노로 조직된다. 존스의 장례식과 이어지는 투쟁 과정은 감정이 지향하는 대상(aboutness)이 선명할 때, 폭력이 ‘운명’이 아닌 ‘타파해야 할 정치적 대상’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피켓 라인은 매시가 말하는 장소의 이동성을 둘러싼 권력 투쟁의 장으로 재현되는 공간이다. 자본은 총기를 든 구사대와 공권력을 동원하여 노동자들의 공간 점유를 방해하지만, 광부의 아내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여성 시위대는 물리적 위협 속에서도 대오를 유지하며 공간의 ‘권력의 기하학’을 재편한다. 영화는 경찰에 끌려가면서 “바바라, 찍어!(Take pictures, Barbara!)”라고 외치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담아내며, 카메라를 저항의 도구로 역전시킨다. 또한 여성들은 단순히 광부의 조력자가 아니라 정동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유지하는 핵심 주체로 등장하며, 이는 개인의 두려움을 집단적 용기로 번안하는 정동적 실천의 과정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할란 카운티 USA>는 산업적 폭력이 정동의 지향성을 통해 어떻게 강력한 저항의 레짐으로 구축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이 시점의 정동은 아직 파업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쟁취할 수 있다는 확신이 감정 구조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은 영미권 탄광 재현에서 분노가 가장 선명한 정치적 대상을 획득했던 시기를 기록하며, 이후 다룰 파업 패배의 정동 및 한국의 침묵 사례와 대비된다.

3. 파업 패배 이후의 교착과 잔인한 낙관: <브래스드 오프(Brassed Off, 1996)>

마크 허먼(Mark Herman)의 <브래스드 오프(Brassed Off, 1996)>는 1980년대 영국 광산 파업 패배 이후 10년이 지났을 무렵, 즉 탈산업화가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굳어진 시기의 정동 레짐을 포착한다. <할란 카운티 USA>에서 목격되었던 뜨거운 분노와 명확한 지향성은 파업 패배라는 거대한 구조적 장벽에 부딪혀 내부로 침전되고 교착된다.

이 영화에서 탄광은 더 이상 노동과 생존의 중심공간이 아닌 사라져 가는 공간이며, 탄광촌 광부들로 이루어진 브라스 밴드는 벌렌트(Berlant, 2011)가 말하는 ‘잔인한 낙관주의(cruel optimism)’가 작동하는 전형적 장소이다. 광산 폐쇄를 둘러싼 논의는 등장하지만 집단적 저항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노동자들이 시도하는 파업이나 투쟁은 <할란 카운티 USA>에서와 달리 정치적 결집으로 이어지는 대신 무력하게 해체된다. 집단 저항으로 전환되지 못한 개인의 좌절과 체념의 감정들 속에서 지휘자 대니는 브라스 밴드에 집착한다. 그에게 음악은 노동계급의 자부심과 공동체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이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집착하는 음악적 성취는 광부들이 직면한 해고와 빈곤이라는 구조적 폭력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된다. 대니가 병든 몸으로 전국 대회 출전에 매달리는 행위는 이전의 번영을 유지하고자 하는 낙관주의적 애착이나, 결과적으로는 현실의 고통을 유예시키고 정동을 교착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정동적 교착은 세대 간에 서로 다른 향수로도 나타난다. 보임(Boym, 2001)의 관점에서 보면 대니가 밴드의 영광을 재건하려는 시도는 상실된 과거를 고정된 형태로 복원하려는 복원적 향수(restorative nostalgia)에 가깝다. 반면, 빚더미에 앉아 광대 분장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들 필의 절망은 근대성의 폐허 속에서 상실을 응시하는 성찰적 향수(reflective nostalgia)의 지점에 존재한다. 그리고 필이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은 구조적 폭력이 정동의 지향성을 잃고 주체 내부로 꺾였을 때 발생하는 극단적인 정동적 붕괴를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의 종반부에 나오는 대회장에서의 연설 장면은 교착되었던 정동이 다시 외부의 대상을 향해 재편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대니는 우승 트로피를 거부하면서 “음악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이 중요하다”라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아메드(2004)가 말하는 감정의 지향성이 회복되는 순간으로, 밴드라는 낙관주의적 대상에 묶여 있던 정동을 다시 탄광 폐쇄를 주도한 정부와 구조적 폭력이라는 정치적 대상으로 돌려놓는 실천이다. 비록 실질적으로 탄광 폐쇄를 막지는 못하지만, 침묵과 체념으로 흐르던 정동을 다시 공적 분노와 애도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영미권 정동 레짐의 끈질긴 정치성을 증명한다.

<브래스드 오프>는 영미권 탄광 재현이 단순한 승리나 패배의 기록을 넘어 구조적 폭력에 의한 정동적 교착을 어떻게 성찰하고 정치적 지향성을 모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정동의 단계적 변모 과정은, 탈산업화와 함께 곧바로 침묵과 향수의 공간으로 고착된 한국의 사례와 확연한 대비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4. 소결: 영미권 탄광 재현의 지속되는 정치성

이처럼 영미권의 탄광 재현은 산업적 폭력이 하나의 고정된 감정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동이 공존하고 전환되는 과정 속에서 재조직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분노와 향수가 중첩된 과도기적 상태가 드러나고, <할란 카운티 USA>에서는 명확한 대상을 향해 정동이 조직되며 집단적 저항으로 전환되는 것이 관찰된다. 그리고 <브래스드 오프>에서는 파업 패배 이후에 정동이 교착과 향수로 재구성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이것은 시대적 흐름에 따른 선형적 단계라고 단순하게 이해하기보다는, 산업 공동체가 처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정동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는 변이의 스펙트럼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동일한 산업 쇠퇴의 경험이라 하더라도, 권력의 기하학(Massey, 2015) 내에서 주체가 점유하는 위치에 따라 분노는 집단적 저항으로 조직되기도 하고 교착과 향수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두 양상은 상호배타적으로 대체해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영미권 미디어에서 관찰되는 정치성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브래스드 오프>에서 나타나는 정동의 교착과 향수는 단순한 탈정치화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계기가 주어지는 순간 다시 외부의 구조적 폭력을 향해 재지향(re-orientation)될 수 있는 잠재성을 내포한다. 이는 영미권 탄광 재현에서 감정이 기억과 상실의 형태로 이동한다고 해도 완전히 사적 영역으로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의미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영미권의 정동 레짐은 분노에서 향수로의 단순한 이행이 아니라 정치적 감정이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면서 지속되는 구조로 관찰된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한국 미디어의 사례에서 정동이 침묵과 향수의 형태로 고착되는 양상과 대비해 보았을 때 산업적 폭력이 감정의 형태로 조직되는 방식은 사회마다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IV. 한국 폐광촌의 재현: 압축된 정동 레짐과 기억의 물화

앞 장에서 살펴본 영미권의 탄광 재현은 탄광 산업의 쇠퇴가 곧바로 노동의 정치성과 집단적 정동의 소멸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분노와 연대, 그를 가능케 하는 계급의식은 성찰적 향수와 애도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고 있었다. 즉, 영미권의 탈산업화는 정치적 정동이 단절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재분배되는 ‘장기적 정동 전환(long affective transition)’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반면, 한국 미디어 콘텐츠에서는 이와 전혀 다른 시간적·정치적 궤적이 관찰된다. 한국의 폐광촌은 국가 주도로 전개된 “압축적 근대화와 산업화의 문제점들이 응집되어 있는 장소(Shin, 2018: 74)”이다. 급격한 산업 전환과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겪은 한국사회에서 탄광은 노동에서 상실로, 집단적 분노에서 개인화된 침묵과 비극으로 한 세대 안에 급격히 전환되는 ‘압축된 정동 레짐(compressed affective regime)’을 보여준다.

이러한 압축성은 한국 탄광 산업의 독특한 구조적 위치에 기인한다. Kim(2023)은 탄광을 국가 주도 산업화 정책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보여주는 핵심 장소로 설명하며, 노동, 이주, 주거 등 다양한 사회적 모순이 상징적으로 집약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이 공간에서 구조적 폭력은 광부들을 ‘국가 발전의 역군’으로 칭송하면서도 실질적 권리로부터는 철저히 배제하는 ‘이중의 침묵’을 강제한다. 윌리엄스의 감정 구조 개념을 통해 이해하자면 한국의 정동 레짐은 분노가 집단적 저항으로 조직될 시간과 공간이 확보되기 전에 이미 이를 ‘과거의 불행’ 혹은 ‘국가적 희생’이라는 애도의 틀로 재편되는 경향성을 보인다.

아메드(2004)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 폐광촌의 정동은 지향성을 상실한 채 내부로 침전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영미권에서 분노가 자본과 정부라는 명확한 대상을 향해 정치화되었던 것과 달리 산업 쇠퇴가 ‘시대적 필연성’이자 ‘개인의 운명’으로 프레임되면서 정동의 방향성이 거세되었다. 본 장에서는 박광수의 <그들도 우리처럼(1990)>과 전수일의 <검은 땅의 소녀와(2007)>를 통해 한국의 탈산업화 정동이 어떻게 비정치화되고 기억의 터(lieux de mémoire)로 물화되는가를 분석한다. 특히 매시의 권력의 기하학 관점에서 누가 이 정동적 변화를 강제했는지, 그리고 어떤 네트워크가 국가에 의해 단절되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1. 침묵과 개인화된 상실의 정동: <그들도 우리처럼(1990)>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은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 이후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탈산업화의 폭력이 노동자들의 일상을 물리적으로 잠식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눈 덮인 고요한 탄광촌의 풍경으로 시작되지만 그곳에 활기나 생기는 찾아볼 수 없다. 영화 안에서 반복적으로 비추어지는 텅 비어 있는 석탄 광차가 줄지어 서 있는 광경 역시 더 이상 생산이 지속되지 않는 산업의 종말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구조적 폭력은 노동자들의 대화를 통해 생생하게 드러난다. 다방 안에서 “아니 이거 폐광된 데는 많고, 사람은 남아도는데, 이거 일손 하나 구하기가 이렇게 힘이 드니”, “실업보상금에 전업융자금 받아먹어야 되는데 누가 푼돈에 연탄공장 일을 하겠어” 하는 노동자들의 대화는, 이들의 노동이 더 이상 삶을 지탱하는 자부심이 아닌 보상과 전업을 위해 유예된 상태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탄광주에게 항의하는 광부 대표의 대사에서는 매시가 말하는 권력의 기하학이 탄광촌 내에서 비대칭적으로 작동하는 장면으로 분석될 수 있다. “그동안 우리가 뼈빠지게 벌어준 돈은 부동산에 다 쏟아놓고 이제 와서 우리한테 아무 상의도 없이 폐광 신청을 할 수 있습니까?” 자본은 이미 다른 공간으로 자산을 옮겨 높은 이동성을 확보한 반면, 노동자들은 장소에 계속 고착되어 있는 낮은 이동성의 비극을 드러낸다. 오토바이를 타는 주인공 시점으로 보여주는 쇠락해 가는 회색빛 마을 거리에는 대부분의 가게들의 문이 닫혀 있으며, 모빌리티를 상실한 장소의 죽음을 보여준다.

아메드(2004)의 정동의 지향성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 속 저항은 뜨겁게 타오르지만 결국 방향을 잃고 흩어진다. 광부 대표는 “회사에서 우리가 일할 수 있는 확실한 대책을 세워주기 전까지는 회사 요구에 응할 수가 없습니다”라며 파업을 예고하고, 실제로 광부들은 파업을 실천에 옮기기도 한다. 담배를 피우며 파업하던 광부들이 주먹을 휘두르며 노래를 합창하는 장면, 여성들이 밤에 횃불을 들고 투쟁 머리띠를 쓴 채 행진하는 장면 등은 분명 영미권 미디어에 드러나는 노동자들의 분노와 닮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의 끝은 승리가 아니다. 임금이 밀린 현장에서 "우린 땅 파먹고 살란 말이냐"는 절규는 터져 나오지만, 이 분노는 체제 변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소진된다. 마지막에 탄광촌을 떠나려는 주인공이 목격하는 탄광의 모습은 경찰서로 줄줄이 연행되는 광부들과 쑥대밭이 된 채 주인 없는 헬멧과 옷가지들만 걸려 있는 ‘물화된 폐허’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광차를 정리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공동체가 해체된 자리에 남겨진 개인의 고독한 정동을 보여준다.

주인공이 민주화운동 동지에게 합류를 거절하면서 말하는 “언제나 그랬듯이 희망에 비해 현실은 항상 초라했다. 그 초라한 현실이 우리의 출발점이지”라는 대사는, 얼핏 희망적이면서도 회피적인 뉘앙스를 보여주며 거창한 혁명적 낙관주의가 무너진 자리에 남은 벌렌트 식 ‘잔인한 낙관주의’를 연상케 한다. 주체가 열망하는 변화가 초라한 현실에 부딪혀 정동적 교착 상태에 머무는 순간을 관통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오늘을 무어라 부르든 간에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사라져야 할 것은 오늘의 어둠에 절망하지만, 보다 찬란한 내일을 사는 사람들은 오늘의 어둠을 희망이라 부른다”는 마지막 내레이션은, 구조적 폭력을 해결하지 못한 채 정동을 다시금 내면화하고 미학화하는 한국적 정동 레짐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도 우리처럼>은 분노와 저항이 분명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떻게 엄혹한 현실이라는 압력 아래 침묵과 개인적 비극으로 사사화(privatization)되는지를 보여주는 압축적 탈산업화의 정동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2. 침묵의 풍경과 침묵의 정동: <검은 땅의 소녀와(2007)>

전수일의 <검은 땅의 소녀와>는 2000년대 중반 폐광 이후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구조적 폭력에 대한 정동이 사건이나 갈등으로 조직되지 못한 채 풍경에 고착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탄광촌은 노라(Nora, 1989)가 말하는 기억의 터, 즉 기존 공동체의 의례가 사라지고 과거의 흔적만이 침전되어 있는 장소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갱도로 내려간 광부들이 등장하지만, 이것은 생동감 있는 생산행위가 아닌 소진된 삶의 반복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이 영화에서 구조적 폭력은 주인공 소녀의 아버지인 광부의 질병과 무력감을 통해 구체화된다. 진폐증으로 인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아버지가 해고 당하고 보상금을 받기 위해 매달리는 과정은 산업적 폭력이 어떻게 주체의 생존권을 침식하는지를 보여주지만, 이에 대한 감정은 분노나 집단행위로 조직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트럭 장사를 시작했다가 사고를 당해 다시 몰락하는 서사도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면서도 그를 바꿀 수 없는 비극적 현실로 고착화한다. 지적장애를 가진 소녀의 오빠가 종탑에 올라가 종을 울리는 장면 역시 그렇다. 자신들의 존재를 외부에 알리려는 시도는 결국 누구에게도 도달하지 못하고 가족 외에는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정동이 외부를 향해 지향되지만 사회적으로 수용되지 못하고 공허하게 되돌아오는 순간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언어화하기보다 침묵할 수밖에 없고,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하는 방식으로만 대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정은 외부의 권력구조를 향해 지향되지 못하고 개인의 삶과 신체, 공간 속에 고착된다.

이렇듯 <검은 땅의 소녀와>는 한국 탄광촌에서 구조적 폭력이 풍경으로 변모하고 정동이 고착된 압축적 탈산업화 형태를 보여준다. 이 안에서 감정은 시간 속에서 변화하거나 전환되기보다 반복되는 일상과 공간 속에서 지향성을 상실한 채 유지되어 있다. 이는 영미권 미디어가 보여준 지속되는 정치성과 대비되는 한국적 ‘침묵의 정동 레짐’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3. 소결: 압축된 정동 레짐과 기억의 정치

이 장에서 살펴본 두 작품은 한국의 폐광촌 재현에서 정동이 조직되는 방식이 영미권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나타남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도 우리처럼>에서 정동은 분명히 발생하지만 집단적 정치성으로 조직되지 못한 채 주인공이 떠난 뒤켠에 남겨지며, <검은 땅의 소녀와>에서는 그러한 붕괴 이후의 정동이 풍경과 일상 속에 고착된 상태로 지속된다.

이러한 정동적 지형의 차이는 각 사회에서 탈산업화가 경험된 시간적·정치적 조건의 비대칭성에 기인한다. 영미권에서 분노와 저항, 애도와 향수가 장기간에 걸쳐 공존하고 변형되었다면, 한국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한 세대 안에 압축적으로 진행되면서 정동이 충분히 정치화되기 이전에 침묵과 상실, 그리고 기억의 형태로 재편되었다. 특히 한국의 경우 구조적 폭력은 명확한 저항의 대상으로 지목되기보다는 ‘시대적 필연성’ 혹은 ‘개인의 운명’으로 인식되면서 정동의 지향성이 약화된다. 그 결과 분노는 집단적 행동으로 조직되지 못하고 개인적 좌절과 체념으로 분산되며, 이후에는 향수와 애도의 형태로 고착화된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폐광촌 재현은 ‘압축된 정동 레짐(compressed affective regi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산업적 폭력이 감정의 형태로 조직되는 과정에서 분노와 저항의 단계가 충분히 형성되지 못한 채, 곧바로 침묵과 향수, 그리고 비정치화된 기억으로 이행하는 구조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한국 탄광촌의 정동 레짐은 영미권의 경우와 달리 정치적 감정이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기보다 사적 영역으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V. 결론

본 연구는 영미권과 한국의 탄광·폐광촌 재현을 비교함으로써 산업적 쇠퇴가 구조적 폭력으로 작동할 때 그것이 어떤 감정의 형태로 사회적으로 조직되는가를 정동 레짐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영미권의 경우 산업 쇠퇴는 분노와 투쟁, 성찰적 향수로 이어지는 장기적 정동 전환의 과정을 보였다. 반면, 한국에서는 이 과정이 한 세대 안에 압축적으로 진행되면서 노동의 붕괴가 집단적 저항 단계를 충분히 거치지 못한 채 침묵과 사사화, 풍경으로의 고착 형태로 재편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문화적 특성이나 미디어 표현의 차이가 아니라 각 사회가 탈산업화를 경험한 시간적·정치적 조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미권에서 탄광은 오랫동안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힘과 집단적 기억이 축적된 공간이었다. <할란 카운티 USA>에서 보듯 1970년대까지도 광부들은 자신의 고통을 자본과 국가를 향한 분노와 저항의 언어로 조직할 수 있었고, 이는 아메드가 말한 감정의 지향성이 유지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산업 쇠퇴는 곧바로 침묵으로 전환되는 대신 <브래스드 오프>에서와 같이 패배 이후에도 애도와 성찰적 향수의 형태로 변형되며 정치적 의미를 지속시킬 수 있었다. 즉 영미권에서는 정동이 단절되지 않고 서로 다른 형태로 재조직되며 공적 영역과의 연결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탈산업화는 훨씬 더 급격하고 외부적으로 주어진 과정이었다. 1980년대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은 광부와 지역 공동체에 집단적 대응의 시간을 주지 않은 채 산업의 종말을 통보하였고, 구조적 폭력은 저항의 대상이 되는 대신 개인의 삶 속으로 침투하였다. <그들도 우리처럼>에서 볼 수 있듯 정동은 분노와 저항보다는 침묵과 체념, 그리고 사적인 비극과 애도의 형태로 사사화되었다. <검은 땅의 소녀와>에서는 이러한 정동이 사건으로 조직되지 못하고 풍경과 일상 속에 고착된 채 지속되었다. 여기에서 고통은 사회적 분쟁의 언어를 획득하지 못하고 내면화된다. 이러한 한국의 압축된 정동 레짐은 산업적 폭력이 감정으로 조직되는 과정에서 분노와 저항의 단계가 정치적으로 형성되지 못한 채 곧바로 침묵과 향수, 비정치화된 상태로 이행된 것이다. 이는 당시 한국사회의 감정 구조 내에 변화의 충격을 흡수하고 정치화할 수 있는 정동적 완충 지대가 확보되지 못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탄광과 폐광촌은 한국사회에서 구조적 폭력이 대표적으로 응축된 공간이며, 이 공간이 어떠한 감정으로 재현되는가는 그 사회의 정치적 가능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침묵과 고착은 그저 탈정치화된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이 직접적으로 발화될 수 없는 조건에서 작동하는 정동의 정치적 형태인 것이다. 본 연구는 감정과 기억의 형태로 이동한 구조적 폭력의 궤적을 추적함으로써, 감정과 권력, 장소와 기억을 연결하는 분석적 지평을 제안하고자 하였다.

다만 본 연구는 영화와 다큐멘터리라는 시각적 미디어 콘텐츠만을 중심으로 분석을 진행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최근 폐광 지역의 기억이 게임 등 다른 체험형 미디어의 기념비적 재현으로 재코딩되는 양상이 존재하는 것을 포괄하지 못했다는 점은 이후 더 넓은 사례 분석을 통해 보완될 필요가 있다. 또한 기존 미디어에서 재현된 정동 레짐과 실제 지역 공동체의 경험과 정동에는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후에는 현장 연구나 구술 면접을 통해 본 연구가 제시한 정동 레짐의 지형을 검증하고 확장할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Notes

* 이 논문은 2021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1S1A5B5A16078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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