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왜 몸인가
김훈의 단편소설 <화장>의 첫 문장이다. <화장>은 2년여 동안 뇌종양을 앓다 생을 마감한 아내의 죽음, “소각완료” 메시지와 더불어 뼛조각 몇 점으로 남은 유골함을 받아들기까지의 장례 과정을 통해 묘사되는 주인공의 심리 서사이다. 작가는 죽음의 의례 과정을 통해 늙음·병듦/젊음‧생동이라는 상반되는 두 몸을 대비시킨다. 살아있는 몸에서만 발생하는 종양세포, 그로 인해 고통받는 아내의 병든 몸과 전립선염을 앓는 ‘나’의 몸은 5년 전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젊은 여성의 생동하는 몸과 대비된다. 이는 곧 죽음과 생, 추와 미의 표상으로 환원된다. 또한 ‘화장’은 죽은 몸을 불태우는 ‘화장(火葬)’과 예쁘게 치장하는 행위인 ‘화장(化粧)’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화장의 중의적 의미를 곱씹게 한다(김훈, 2014)1). 김훈의 소설이 몸에 대한 심층적 탐구로 읽혀지는 이유다.
삶은 탄생과 더불어 시작해 타인들과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다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몸은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토대이다. 푸코가 몸을 우리에게 강요된,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장소요, 말 그대로 내가 일체가 되는 작은 공간”이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의 몸과 삶이 맺고 있는 분리불가능성 때문일 것이다(미셸 푸코, 2014:28).
이처럼 우리가 태어나서 몸을 가지고 죽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점차로 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불확실해지고 있다. 이식수술, 유전공학, 성형수술, 생물학적 복제, 수명연장, 보조출산 등 의학적․기술적․과학적 지식이 증가하고 정교해지면서 출생, 삶, 신체 및 죽음에 대한 확실성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의 몸을 ‘순수하게’ 구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인가, 출생은 언제 시작되고 육체의 수명은 언제 끝나는가에 대해 더더욱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쉴링, 2006: 22-23, Sarah Nettleton, 2021: 47). 이러한 상황은 몸이 윤리적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뒤늦게 사회학의 하위분야로 자리잡은 몸의 사회학은 최근 건강과 질병, 다이어트, 성형, 비만, 보디빌딩, 욕망과 섹슈얼리티. 장기이식, 거식증과 폭식증, 장애, 죽음, 사이보그, 포스트휴먼…등 “사회 풍경 속의 몸”에 대한 이론화 및 의미 해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본고는 몸의 사회학의 이론화에 주목하면서 몸의 사회학의 확장 가능성, 특히 ‘장애(죽음)와 몸의 사회학’의 가능성 탐색에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몸에 대한 사회학적 주요 관점과 이론가들을 검토하고, 지금까지 몸의 사회학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핵심 이슈들과 주요 사회이론가들에 대한 논의하며, 마지막으로 몸의 사회학의 여백으로 남아있는 장애, 노화, 죽음과 몸의 사회학이 정초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몸의 사회학의 등장 배경
몸이 사회학의 하위분야로 자리하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오랫동안 몸이 사회학장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것은 몸은 정신에 비해 열등하고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간주해온 서구 철학의 이원론적 전통과 사회학이 창시되던 당시의 인식론에 기인한다.
우선, 서양 철학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몸의 이미지는 동물, 식욕, 속이는 자, 영혼의 감옥, 영혼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존재로 표상된다. 예컨대 몸은 플라톤에게 우리의 인식에 혼란을 안겨주는 것, 슈바르츠에게 내면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적 사고에서 성적인 몸은 저속하고 본능적인, 동물의 메타포로 표현된다(수전 보르도, 2003: 14-15). 그리고 그 정점에는 ‘코기토 명제(Cogito, ergo sum)’2)로 대변되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유산이 있다. 데카르트는 플라톤 이후부터 그리스 철학에서 예견되었던 몸을 마음으로부터 분리시킨 것뿐만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영혼을 분리시켰다. 즉 마음(사유하는 실체)/몸(물질적인 실체)로 확실히 선을 긋고, 몸은 인과적인 법칙과 자연의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로 비유했다. 요컨대 데카르트는 몸/마음이라는 이항 대립을 지식체계와 연결시키고, 자연(성)을 지배하거나 초월하는 마음을 우월적 위치로 자리매김시켰다. 이는 몸을 부차적이고 주변적이며 심지어는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몸 부정의 인식론과 연결되는 지점이다(엘리자베스 그로츠, 2001: 56-58; 김남옥, 2012: 292).
다음으로는, 사회학적 전통을 들 수 있다. 터너와 쉴링은 몸이 사회학적 탐구 주제에서 배제되었던 이유를 사회학이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찾는다. 사회학은 애초에 인간의 상호작용이 지닌 사회적 의미를 주요 탐구 대상으로 삼는 학문으로 등장했다. 터너는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이 제도화되는 과정도 유전학이나 진화론적 생물학과 분리를 수반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쉴링 또한 뒤르케임을 비롯한 고전 사회학자들의 우선적인 관심이 자연과학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학문분야를 확립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몸이 사회학적 연구에서 밀려났다고 보았다. 특히 뒤르케임에게 생물적인 몸은 자연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사회학자의 연구 영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회학은 오랫동안 이러한 시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쉴링, 2006: 48).
결국 몸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사회학의 핵심 주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을 말해야 할 만큼 몸에 관한 관심이 폭증하고 있다(Sue Scott & David Morgan, 1993:2: 김남옥, 2012: 303). 그렇다면 1980년대 이후 몸의 사회학이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크게 인식론적 전환과 사회적인 변화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이성 중심의 이원론을 배격하는 철학자들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스피노자와 니체의 선구적인 노력에서 출발해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 등 생활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경험의 철학, 현상학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사유로 이어지는 철학적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구체적인 일상생활이 펼쳐지는 생활세계, 생생한 경험의 주체인 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의 사유는 몸-중심의 연구로 이어지는 동력이 되었다(김남옥, 2012: 296). 더불어 페미니즘운동, 소비문화의 등장과 개인화, 몸에 대한 통제 기술의 발달, 고령화 사회의 등장과 같은 인구학적 변화는 몸에 관한 관심을 폭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몸이 사회학의 주요 의제로 부상하게 된 데에는 터너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고 평가된다. 1984년 출간된 『The Body and Society』에서 그는 몸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 및 이론 작업의 의제를 설정함으로써 ‘몸의 사회학’에 매우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했다고 보는 것이다.3) 특히 의학과 규율 그리고 몸에 대한 푸코의 저작들은 몸, 욕망과 섹슈얼리티, 국가의 규제 역할 등 다양한 관심을 가진 연구자들을 고무함으로써 몸이 사회학의 전면에 부상하는 데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터너, 2010:784).
Ⅲ. 몸에 관한 주요 관점들
몸의 사회학은 정신/몸(정신에 예속된 몸)이라는 이원론, 몸에 대한 자연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사회구성주의적 관점과 현상학적 관점이다. 다시 말해 몸의 사회학적 접근방식은 양극단에 자리하고 있는 자연주의적 관점과 사회구성주의적 관점, 그리고 이 둘의 간극 사이를 연결하는 현상학적 관점으로 나누어 설명가능하다.
자연주의적 관점은 몸이 보편적인 현상이며, 사회적 맥락에 관계없이 존재하는 생물학적 존재라고 가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자연주의적 주장들이 모두 동일한 것은 아니나, 몸을 전(前)사회적, 생물적 토대로 보는 관점을 공유한다. 쉴링에 의하면, 몸에 대한 자연주의적 관점은 18세기에 출현하였고, 그 이래로 사람들이 몸과 자아정체성,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쳐왔다고 주장한다.
자연주의적 관점은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관계가 생물학적으로, 유전적으로, 그리고 진화론적으로 결정되었다고 본다. 부나 법적 권리·정치적 권력에서의 불평등은 생물학적인 몸에 의해 주어진 것이지, 사회적 구조나 관계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쉴링, 2006: 69). 말하자면, 사회적 불평등이란 자연적, 유전적인 요인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 바로 이에 속한다.
사회생물학적 설명의 기본 단위는 유전자이다. 유전자는 사람의 피부색이나 혈액형과 같은 기본적인 특성들을 결정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인성’과 같은 좀 더 복잡한 특성들은 유전자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가정환경, 사회적 상호작용, 교육 등 사회적·구조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회생물학적 주장은 성차(性差)나 인종적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는 ‘차별관념(idea of difference)’을 유포해왔고, 대중적인 사고를 지배해왔다(쉴링, 2006: 80).
우월/열등, 정상/병리의 구분 및 차별 관념을 근간으로 하는 자연주의적 관점이 지배적인 담론의 지위를 점하게 된 배경은 18세기 전후의 사회적 변화 물결과 관련을 맺는다. 쉴링과 네틀턴에 따르면 18세기 이전까지는 ‘하나의 성과 하나의 육체(one sex/ one flesh)’ 모델이 성차(性差)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였다. 물론 남성의 몸이 표준으로 간주되긴 했다. 그러나 여성들도 남성이 가진 생식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동일하나, 단지 그 생식기들이 몸의 바깥/내부에 위치해 있는 것이 다를 뿐이라는 인식이 고대부터 17세기 말까지 널리 받아들여진 인식이다. 그런데, 18세기에 이르러 ‘하나의 성과 하나의 육체’라는 ‘이체동형(異體同形)모델’은 ‘비교가 불가능한 해부학적 구조와 생리학적 모델’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이는 그 시기에 일어난 생리학과 해부학의 혁명적인 변화에 기인한다. 네틀턴은 17세기 말부터 남성과 여성은 다르다고 보기 시작했고, 그 다름에 대한 담론은 생물학적 차이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고 보았다. 남성의 해부구조는 인간 신체의 표준이요, 여성의 해부구조는 기준에서 벗어난 일탈적인 것으로 묘사되고, ‘다른 것(other)’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18세기 말, 사람들에게 반대의 성과 뚜렷이 대조되는 자아 정체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인간 속성으로서 ‘섹슈얼리티’ 개념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쉴링, 2006: 71-74; 네틀턴, 2018: 144-146).
쉴링은 여성들의 열등함에 대한 유전학 이론이 발달하던 시기가 여성운동이 부상했던 시기(1960년대 후반~1970년대) 및 경제위기(1970년대 초)가 닥쳤던 시기와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그 시기에 나온 영향력 있는 이론들을 종합한 것이 사회생물학의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자연적이고 바람직한 것/병리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구분함으로써 사회적인 불평등과 소수자 억압을 정당화하는 정치논리에 포섭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여성은 완전하고 규범적인 몸을 소유한 남성에 비해 불완전한 몸을 가지고 있는 열등한 존재이므로 여성들의 시민적,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제한하려는 시도가 반복되었으며, 남성과 여성이 각각 공적/사적 영역에 적합한 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 것이다(쉴링, 2006: 79~81).
몸에 대한 자연주의적 접근이 몸을 차별화하고 예속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주요 수단으로 작용한 것은 성차(性差)뿐만 아니라, 인종, 계급, 민족 또는 국가에도 적용되어 흑인, 피지배계급, 이민족에 대한 차별과 억압 또한 정당화한다. 이는 지속적으로 비판받는 이유이다.
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몸에 대한 자연주의적 접근방식을 거부한다. 몸의 생물학적 기반이 사회적 관계 및 사회생활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보는 것은 몸의 성격이 사회적 맥락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외면한 것이자 몸이 사회생활의 기초를 형성하고, 그것에 기여하는 방식을 간과했다는 것이 비판의 주된 이유이다. 자연주의적 접근방식이 명백히 환원주의적이고 결정론적이며 과학적으로도 오류라는 것이다.
자연주의적 접근방식은 인체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에 지속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사회이론가들은 몸이 사회적 의미의 생성체라기보다는 수용체라는 전제에 입각한 보다 더 매력적인 관념과 이론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구성주의란 용어는 몸이 어느 정도 사회에 의해서 형성되고 구속되며 창출되기까지 한다는 견해를 나타내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쉴링, 2006: 109).
이처럼 사회구성주의는 몸을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하나의 실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와 지위, 그리고 운용 방식 등은 사회적 맥락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는 입장이다. 물론 사회구성주의자들의 접근방식이나 주장은 매우 다양하다. 푸코와 같이 몸이 호명되고 다루어지는 방식, 질병이라고 하는 것이 이에 대한 담론의 결과로 보는가 하면 쉴링의 견해처럼 몸이 사회적 관행과 사회적 맥락에 의해 형성되고 변화되는 물질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관점도 존재한다. 또한 다음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뒤르케임의 전통을 이어받은 메리 더글라스는 몸을 지각하는 방식이 사회적 몸(social body)에 의해 매개된다는 견해를 표명한다. 말하자면 몸은 사회적 분류체계에 기초를 제공하는 반면, 몸을 지각하는 방식은 사회조직을 지각하는 방식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 역시 몸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입장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네틀턴, 2018: 147~148).
사회적 몸은 육체적 몸의 지각방식을 규정한다. 몸의 육체적인 경험은 사회적 범주 속에서 이해되고, 언제나 사회적 범주에 의해 조절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사회관을 갖게 마련이다. 두 가지 몸의 경험 사이에는 지속적인 의미교환이 있으므로 한쪽은 다른 한쪽 범주를 강화시킨다. 이러한 상호작용을 놓고 볼 때, 몸 그 자체는 고도로 억제된 하나의 표현수단에 불과한 존재라고 볼 수 있다(Douglas, 1970:ⅷ, 사라 네틀턴: 2018: 148, 재인용).
더글라스의 이 같은 연구는 몸이 사회적 의미를 담는 담지체이고 사회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부르디외는 몸을 상징가치의 담지체로 본 더글라스의 논의를 발전시켜 독창적인 이론을 이끌어낸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른 접근으로는 고프만의 연구를 들 수 있다.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기하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자아연출의 사회학』을 통해 알 수 있듯 인간은 공적인 장소와 사적인 장소에서의 행동이나 자아표현 방식은 상이하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만남과 사회적 역할,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 몸의 운용이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몸의 운용은 개인의 자아 정체성과 사회 정체성의 관계를 조정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몸은 특정한 유형의 자아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관리될 수 있는 하나의 자원으로 작용한다. 몸과 정체성의 관계에 대한 최근의 사회학적 연구들은 고프만의 영향에 힘입은 바 크다 할 수 있다.
이처럼 사회구성주의자들의 입장은 매우 다양하지만 공통된 의견은 몸을 생물적 현상으로서만 분석할 수 있다는 견해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또한 몸에 부여되는 특성과 의미, 그리고 상이한 집단들의 몸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가 사회적 산물이라는 입장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쉴링, 2006:109).
현상학적 접근은 ‘살아 있는 몸’의 ‘살아있는 경험’을 강조한다. 이는 자연주의적 관점과 사회구성주의적 관점의 양극단을 중재하는 입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연주의적 접근은 몸이 보편적인 현상이며, 사회적 맥락에 관계없이 존재하는 생물학적 실체라고 가정한다. 반면에 사회구성주의적인 접근은 몸이 사회적으로 창조 또는 발명되었기 때문에 사회적·역사적 맥락에 조건지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특정한 시기의 몸의 실재는 단순히 몸을 관찰하고 검토하는 방식에 따른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상학적 접근은 인간의 몸을 이해하는 열쇠는 마음(mind), 또는 더 정확하게는 ‘살아온 경험(lived experience)’이라고 제안한다. 즉 인간은 해석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각기 의미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존재인 것이다(네틀턴, 2018: 143~144).
요컨대 자연주의적 관점은 몸의 생물학적 기반이 인간적·사회적 생활의 모든 측면을 결정한다는 것으로 수렴된다. 이에 대해 사회구성주의자들은 몸에 대한 사회적 영향력을 무시한 매우 편협하고 설득력 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한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몸이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몸은 사회적 관계나 사회적 맥락에 따라 형성되고 변화하는 것으로, 쉴링의 표현을 빌자면 “몸은 끊임없는 재해석의 대상”인 것이다(쉴링, 2006: 107-109). 몸을 사회적 구성물로 보는 이들의 관점은 몸이 고도로 변형가능한 이데올로기적 자원이라는 유용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 또한 사회생활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는 “몸의 물질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현상학적 접근은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연결하고 있다. “인간의 몸은 자연적인 진화의 산물임과 동시에 인간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알폰소 링기스(Alphonso Lingis)의 주장은 현상학적 접근을 잘 대변하는 예라 할 수 있다(알폰소 링기스, 2006:9).
몸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은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에서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를 거쳐 현상학적 사회학의 창시자 알프레드 슈츠에 이르는 현상학적 전통에 토대를 두고 있다. 몸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 방식이나 주장 또한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현상학적 접근의 핵심 주제는 생활세계에 뿌리 내리고 있는 살아 있는 몸의 경험의 중요성이라 할 수 있다.
후설은 생활세계와 지향성 개념을 통해 구체적인 생활세계 안에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 사물과 세계와 타자에게로 향하는 지향성을 지닌 인간의 존재 양식에 집중했다(김남옥, 2012: 294). 생활세계, 살아있는 몸의 경험을 강조한 후설의 연구는 ‘몸의 현상학’을 정초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메를로 퐁티는 후설 이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으나, 새로운 방식으로 몸을 이해할 수 있는 현상학적 방법들을 제공한 인물이다. 현재 우리 몸의 활력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 몸의 현상학적 방법들은 “메를로퐁티가 세공한” 것이라는 알폰소 링기스의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알폰소 링기스, 2006:12).
메를로퐁티가 가장 비중 있게 천착한 주제는 ‘살아 있는 몸’이다. 몸은 우리가 살아가고, 경험하고, 그 경험을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 근본적인 토대이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몸은 경험하는 현상이며, 따라서 몸은 우리를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있게 해주고 사회적 관계를 맺게 해주는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몸은 세계와 분리된 주체가 아니며, 마음은 물질과 공간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몸은 ‘세계 내’에 있으면서 ‘세계로 향한(being-to-the world)’ 주체, 즉 인식과 성찰뿐만 아니라, 지각과 행동의 주체이다. 이는 몸이 객체가 아니라는 전제와 더불어 단순한 주체도 아니라는 의미를 지닌다. 몸은 객체와 관계 맺는 조건이자 맥락인 것이다(그로츠, 2001:190- 191).
‘체현의 현상학’으로 명명할 수 있는 철학적 유산과 연결되어 있는 현상학적 접근법은 “살아 있는 몸”의 개념과 “체현”의 개념을 강조하여 자아와 몸은 분리되지 않으며, 경험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구현된다는 점을 강조한다(Nettlton, 2018: 52-53). 자아가 체현된다는 생각을 채택한 기든스, 사회적 상황이 자아와 정체성에 결정적이라는 관점을 취한 고프만, 광범위한 경험적 연구들을 수행한 가핑클과 그 외 민속방법론자들은 현상학적 접근법을 채택한 대표적인 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지류를 형성하고 있는 생생한 몸의 경험에 대한 연구도 이에 해당하는 연구들이다. 프랭크와 같은 질병의 경험에 대한 연구, 주디스 버틀러나 아이리스 영을 비롯한 페미니스트들이 수행한 여성의 육화와 산 경험에 대한 연구, 장애 경험에 대한 연구 등 몸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법의 연구는 매우 다양하다. 또한 보디빌더, 스포츠선수, 무용수 등 지각하는 몸이 지닌 적응력을 기반으로 한 연구들이 이에 해당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몸을 바라보는 주요 관점은 자연주의적 관점, 사회구성주의적 관점, 현상학적 관점으로 요약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몸에 대한 자연주의적 관점에 비판적이다. 즉 몸에 대한 사회학적 관점은 주로 ‘몸이 끊임없는 재해석의 대상’이라고 보는 사회구성주의적 관점과 ‘살아있는 몸의 살아 있는 경험’, 즉 체현(體現)을 강조하는 현상학적 관점을 취한다.
Ⅳ. ‘몸의 사회학’의 주요 의제
몸의 사회학의 주요 의제는 학자들마다 다소 상이하게 정리하고 있다. 터너는 몸의 사회학이 몸의 문화적 표상과 섹슈얼리티, 젠더, 몸, 그리고 건강한 몸과 병든 몸, 이 세 가지 영역에서 발전하고 있다고 보았다. 스콧과 모건은 터너의 연구에서 존재와 몸의 관계 및 가치를 Reproduction(재생산), Representation(표상), Regulation(규제), Restraint(억제)라는 ‘4R’을 추출하였고, 네틀던은 몸의 사회적 규제, 몸의 존재론-사회구성주의적 관점, 체현의 사회학으로 요약한 바 있다. 또한 필립 스미스(Philip Smith)는 몸의 사회학을 설명함에 있어 몸과 사회질서(재생산, 규제, 억제, 표현), 체현과 관련된 몸의 기술 또는 신체 도식, 크리스 쉴링이 제시하고 있는 몸 프로젝트, 즉 식이요법이나 성형수술 등으로 대변되는 신체 변형, 성매매와 같은 몸의 상품화와 나이듦과 육체의 죽음 등을 핵심 논제로 설명하고 있다(터너, 2010: 787; Sue Scott & David Morgan, 1993: Sarah Nettleton, 2021: 47).
이처럼 몸의 사회학의 주요 의제를 풀어가는 방식은 상이해보이나 실제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본 글에서는 (1) 사회적 통제와 몸, (2) 소비문화와 몸, (3) 젠더와 몸, (4) 테크노사이언스와 몸이라는 주요 의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몸의 사회학의 주요 의제 중 첫 번째는 몸의 사회적 규제 또는 통제이다. 이는 우리의 몸이 고도로 정치화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터너는 “육체사회(somatic society)”의 논변을 통해 오늘날 주된 정치적 관심사는 몸에 대한 사회적 규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못 박는다. 안전한 섹스, 성교육, 무료 콘돔 및 청결....등 몸과 몸 사이를 규제하고, 몸과 사회 또는 문화 간의 인터페이스를 모니터링하는 방법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Bryan S. Turner, 1992: 12).
미셀 푸코는 몸을 권력과 연계시켜 분석한 선구적인 학자이다. 『임상의학의 탄생』(1963), 『광기의 역사』(1972), 『감시와 처벌』(1975), 『성의 역사』(1976~1984) 등의 저작에서 알 수 있듯 푸코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근대사회에서 몸이 어떻게 통제․구분․재생산되기 위해 만들어지는가이다. 터너에 의하면 푸코가 몸에 행사되는 권력을 몸의 규율과 인구규제라는 상이하면서도 연관된 두 가지 쟁점들을 제시했다고 보았다. 몸의 규율은 개체적인 몸들과 관련된 ‘해부학적 정치(anatomo-politics)’로 제시된 반면, 인구 규제는 종으로서의 몸을 대상으로 하는 ‘생명정치학(bio-politics)’을 수반한다(터너, 2002: 131-132).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프랑스 국왕 시해를 시도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다미앵의 참혹한 형 집행 장면과 그로부터 80년의 시차를 두고 나타난 교도소의 시간표를 대비시킴으로써 18세기 절대왕정시대의 군주권력과 근대의 규율 권력의 차이를 드러낸다. 근대의 규율권력은 판옵티콘으로 상징되는 감시테크놀로지로 인해 죄수들은 끊임없이 자기모니터링과 자기규제를 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에게 요구하는 규율을 내면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팝옵티콘(Panopticon)의 원리는 사회보장기록, 은행계좌 내역서, 학교 시간표 및 성적표, 군사교육, 스케줄, 일상생활의 시간 통제 등에 대한 논의로 연결된다. 규율권력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회적 통제에 순응하는 순종적이고 유순한 몸을 창출하는 데 있다(필립 스미스, 2015:213-215).
푸코가 제시한 몸에 행사되는 권력의 두 번째 형태는 생명권력(bio-power)이다. 규율 권력이 감시테크놀로지를 통해 개인들의 몸을 길들이고자 하는 미시권력이라고 한다면 생명 권력은 전체 인구의 출생·사망률 조절과 복지 및 장수의 확대를 통해 지속적인 생산력을 확보하려는 거시 권력의 형태인 것이다(쉴링, 2006:116: 김남옥 212:303 재인용).
이처럼 삶의 관리를 체계화하는 몸의 통제는 개별 신체와 인구라는 두 가지 수준에서 작동한다. 즉, 규율권력은 개별 신체가 규제되고, 훈련되고, 유지되고, 이해되고, 관찰되는 몸의 해부학적 정치학이라면 생명권력은 인구가 모니터링되는 ‘인구의 생명정치’이다. 이러한 푸코의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 몸과 정치, 그리고 섹슈얼리티 간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관계에 대한 탐구와 인구를 규제하고, 개인들의 몸을 진단하는 의료사회학, 첨단기술과 몸 등 실로 광범위한 영역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 또한 권력의 통제와 관련한 몸을 연구의 주된 테마로 삼은 학자이다. 그의 몸에 대한 관심은 주로 행동규칙과 감정 통제 양식의 역사적인 변화와 몸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말하자면 봉건제도의 쇠퇴와 궁정사회의 발전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기대되는 몸 관리 방식을 내면화해가는 과정, 즉 오랜 문명화과정의 결과, 감정과 몸을 표현하는 방식에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이다(쉴링, 2006, 217: 밥 애슬리 외, 2014:77).
엘리아스에 따르면 봉건체계 내에서 귀족계급에게 기대되는 행동방식은 어떠한 견제도 통제도 받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거칠고 잔인하였으며, 쉽게 폭력을 분출하고 행동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고문, 수족절단과 살인에서 쾌락을 느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늘 자신을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행동을 통제하거나, 감정을 억제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궁정사회의 출현으로 폭력이나 행동에 대한 규제 장치, 즉 예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던 중세의 상황은 바뀌었고, 그에 따라 궁정귀족의 행동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절대왕정의 군주가 무력을 독점함에 따라 공적 영역은 점차 평정되었고, 국가의 발전으로 분업이 증대됨에 따라 궁정은 사회적 이동의 유동성이 증가했으며, 성원들은 상호의존적인 영역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기에는 지속적으로 감정통제의 요구가 있었고, 세분화된 몸 관리 규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궁정은 르네상스 이후 그 중요성이 점점 증대되어오다 17~18세기에는 서유럽국가에서 나를 대표하는 위치를 점하게 된다(쉴링, 2006, 217: 밥 애슬리 외, 2014:77; 네틀턴, 2018:158).
궁정사회는 식사, 배설, 성관계, 공격충동 등에 이르기까지 고도로 세분화된 몸 관리 규범을 제도화했고, 이러한 규범은 점차 사람들을 차별화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자제력의 과시는 점차 사회적 구별짓기의 표지가 된 것이다. 매너, 예절바름은 군주나 그 신하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될 뿐만 아니라, 궁정사회로 진입하고자 애쓰고 있는 상인계급들과 자신들을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지표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밥 애슬리, 2018:78).
엘리아스는 점차 몸 관리 규범을 내면화해가는 ‘몸의 점진적 문명화 과정’으로 칭한다. 결국 본능적이고 폭력적이며 야만적인 중세의 전사적 인간상에서 점차 세련된 예법을 갖춘 ‘문명화된’ 인간상으로 바뀐 것은 전쟁 또는 결투와 같은 중세의 전사적 ‘합리성’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가치를 내면화한 결과라는 것이다. 쉴링은 이를 근대적 합리성의 구축 과정, 중앙집권이라는 근대적 권력 질서의 메커니즘이 작동해 나가는 ‘과정’에서 몸의 사회화, 즉 문명화된 몸이 탄생했다는 의미가 된다고 풀이한다(쉴링, 2006: 183; 김남옥, 2012: 304).
푸코와 엘리야스 외에 몸의 규제는 다이어트, 몸 만들기, 성형수술 등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다.
몸에 관한 주요 의제 중 간과할 수 없는 주제는 소비사회 속의 몸이다. 젊고 건강한 몸, 날씬하고 매력적인 몸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현대인의 윤리로 간주된다. 오늘날 다이어트, 성형수술, 피트니스, 피부 관리, 치장, 제모, 보디빌딩, 바디프로필 문화 등은 집단적 문화현상이 되었다.
이는 근면, 절약, 절제가 강조되던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를 적극 장려하는 후기산업사회로 전환된 것과 관련이 깊다. 노동과 금욕의 에토스로 대변되는 청교도주의 시대는 노동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강조되었고, 여가는 노동과정에 투입될 노동하는 몸을 재생산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스트 포디즘 경제와 맞물린 소비문화가 부상하면서 몸은 쾌락과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간주되었다(터너, 2002,65; 쉴링, 2006: 61). 몸은 더 이상 악의 담지체가 아니라, 투자되고 숭배되어야 하는 대상이 된 것이다.
소비사회의 보편적인 윤리적 가치는 아름다운 몸을 위한 쾌락의 실천에 있다. 현대인의 의무는 지속적으로 보살피고 가꾸며, 심지어는 빼고 집어넣고 고치고 변형해서라도 아름다운 몸을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군살, 처진 살, 노화에 따른 주름, 늘어진 살, 삐져나온 살은 우리의 삶에서 반드시 물리쳐야 할 적으로 간주된다. 그러한 배경에는 몸에 대한 양식화된 이미지들을 확산시키는 미용산업, 광고, 텔레비전, 대중언론, 영화, SNS 등이 자리한다. 대중매체가 제시한 이상적인 몸 이미지는 미용, 헬스 상품의 구매와 성형을 자극하는 광고- 주목받는 섹시한 몸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라는 각종 광고에 의해 더욱 강화되는 것이다. 이런 광고들은 오늘날 몸이 곧 ‘자본’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수전 보르도, 2003; 발트라우스 포슈, 2004; 임인숙,2002: 185).
이러한 상황을 포착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발트라우트 포슈(Waltraud Posch), 수전 보르도(Susan Bordo),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와 같은 여성주의 학자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마이크 페더스톤(Mike Featherstone)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소비문화 이론가들, 이 모든 현상들을 몸의 자본화로 규정한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캐서린 하킴(Catherine Hakim) 등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주의적 관점을 견지한 포슈는 오늘날 몸이 사람의 가치를 나타내는 척도이자 전쟁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몸을 가꾸고 돌보면서 몸을 통해 자기 존재 가치를 드러내고자 한다. 반면 자기 몸에 대해 불만스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도 증가한다. 이는 몸이 혐오의 대상이자 갈등을 집결시키는 장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강조되는 아름다움은 “단단하고 꼿꼿하며 군살이 없는 날씬한” 몸매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젊어보이는 외모이다. 사람들은 뚱뚱하거나 많이 먹는 행위에 대해 부단히 자책감, 수치심을 느끼고 자존감의 상실을 경험한다. 또한 아름다움에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이어트, 살 빼는 약, 피트니스와 화장술, 성형수술 등으로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여성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강조되는 것은 영양 결핍으로 보일 정도의 야윈 몸매이다. 날씬함에 대한 극단적인 강박은 거식증을 야기하기도 한다. 수전보르도는 이를 “문화의 결정체로 나타나는 정신병”으로 규정한다(포슈, 2004; 수전보르도, 2003: 175).
포슈는 이러한 현상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의 몸이 시장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오늘날 아름다움이란 일종의 경제시스템이고, 매력을 사고파는 소비사회에서 아름다운 외모는 성공의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의 몸은 곧 자본이요 화폐가 되는 것이다. 포슈는 소비사회의 이러한 장치들이 특히 여성들을 통제하는 잣대로 작동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최근에는 남성들도 외모에 대한 중압감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페더스톤과 보드리야르 또한 소비문화 내에서 광고를 비롯한 대중 매체가 몸에 대한 양식화된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소비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몸과 성(性)의 해방을 표방하면서 몸의 ‘재발견’이 이루어졌으며, 오늘날에는 몸이 광고, 모드, 대중문화 등 모든 곳에 범람하고 있다는 것이다.
페더스톤에 따르면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생산되고 마케팅되고 판매되는 신체관리유지용품들은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외모와 신체적 표현의 중요성을 널리 유포시킨다. 소비문화는 자기 몸은 스스로 돌본다는 자기보존주의적 관념을 내면화하도록 설득한다. 이 관념은 각각의 개인이 자신의 노화나 기능 저하에 맞서기 위한 도구적 전략들을 채택하도록 부추기고, 여기에 쾌락과 자기표현의 수단이 곧 몸이라는 관념을 결합시킨다고 보았다(Featherstone, 1982: 18). 요컨대 소비문화에서는 아름답고, 성적이며 쾌락과 여가, 그리고 과시적인 몸과 연결되어 있는 몸 이미지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신체 관리 및 유지를 위한 실천이 새로운 윤리로 부상한 것이다.
보드리야드는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몸이 구원의 대상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보았다. 과거에는 영혼이 몸을 둘러싸고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복, 기호와 유행이라는 피부가 몸을 감싸고 있는, 그야말로 몸이 영혼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몸을 방치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위이자 죄를 짓는 행위이므로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 이 무책임에 대한 죄는 더 이상 신이 내리는 벌이 아니라, 억압적이며 피해망상적 증후, 노이로제 등 자기의 몸이 주는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몸이 배려의 가장 아름다운 대상이자 소비의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지님을 의미한다.
이에 보드리야르는 자기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 ‘내부로부터’ 자기애적으로 몸에 투자해야 함을 제안한다. 이는 물론 몸에 대한 깊이 있는 앎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페티시즘적이고 스펙터클의 논리에 따라 몸을 다른 사물보다 더 매끄럽고, 더 완벽하고, 더 기능적인 대상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식민지를 개척하거나 광물을 채굴하듯이 몸을 관리하고 개발함으로써 눈에 띠는 아름다운 외모를 갖추는 순간 몸은 최상의 가치를 얻게 된다는 것이 보드리야르가 강조하는 지점이다. 이와 동시에 보드리야르는 자기애적인 몸에 대한 집착이 인간해방도, 자기완성의 수단도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문제의 본질은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즉 몸은 자본주의적 목표에 따라 투자되는 것이고, 이 투자는 몸으로 하여금 이윤을 발생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몸은 하나의 자산으로 관리‧ 정비되고,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는 여러 기호 형식 중의 하나로 조작되는 것이다”(보드리야르, 2002: 192-194).
몸과 소비문화와의 긴밀한 관련성에 초점을 두고 사회적 통제를 행사하는 방식으로 ‘신체 유지 관리 및 건강 보존’, 즉 자기보존주의적 관념을 연구하고, 이론화한 학자들은 페더스톤, 보드리야르, 포슈 외에도 많다. 이들의 주장은 ‘신체 유지 관리’라는 용어가 ‘기계로 비유되는 몸’을 나타내는 지표이므로 자동차 및 기타 소비재와 마찬가지로 몸도 최대 보존을 위해 서비스, 정기적인 관리 및 주의를 기울여 몸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 소비사회의 새로운 윤리라는 입장으로 수렴된다. 잘 관리된 몸은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갖추어야 할 미덕이라는 것이다(Maricel Oró Piqueras, 2007:91).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심층에는 오늘날 우리의 몸은 투자되어야 할 대상이며, 이윤을 발생시키는 다중적인 상품으로 기능한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부르디외가 제시한 ‘신체자본’이라는 개념과 맥이 닿아 있다.
부르디외의 몸에 대한 관심은 문화자본 개념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가 말하는 문화자본은 근본적으로 몸과 연결되어 있다는 속성을 지닌다. 문화자본의 속성이 장기간 지속성을 지닌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성향, 습성과 같이 체현(體現)된 것이란 의미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이를 신체자본으로 개념화해 몸을 자본의 한 형태로 다루고 있다.
부르디외의 ‘신체자본’ 개념은 사람들이 왜 자신의 몸에 시간과 돈, 그리고 에너지를 투자하고, 그 대가로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자본의 한 형태로서 몸은 도덕적, 사회적 가치를 모두 나타내는 상징적인 지표가 되었다. 성형수술, 메이크오버(makeovers), 운동, 다이어트, 피어싱, 의상, 헤어스타일, 문신 등 사람들이 아름다운 외모를 위해 행해지는 노력은 곧 사회의 장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몸을 계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일과 여가, 그리고 그 밖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몸을 다른 형태의 자본-경제자본, 사회자본, 문화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Bourdieu, 1986; David J. Hutson, 2013: 64-65; 쉴링, 2006: 186).
요컨대 소비문화에서 몸은 소비의 대상이자 자본으로 간주된다. 몸은 관리되고 정비되며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는 지표로 인식되는 것이다.
몸의 사회학은 몸과 영혼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 몸을 이성적 ‘인간의 본질’보다 낮은 것으로 격하시킨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공격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몸은 영혼의 부속물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구성물이자 권력과 공생적 관계를 맺고 있는 물질적, 상징적 과정의 기본적인 요소라는 새로운 관점과 틀을 개발한 것이다. 그 여정에 몸에 대한 여성주의적 관점을 견지한 학자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몸이 사회학적 연구주제로 부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이원론과 젠더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수전 보르도는 이와 같은 이원론적 도식이 종종 젠더화로 연결된다는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몸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전제되었던 부정적인 의미가 여성에게 덧씌워졌기 때문이다. 남성은 ‘순수 이데아, 절대정신, 육체를 벗어나 전적으로 자유로운’ 등의 의미를 상정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여성에게 투사된 이원론의 내용은 ‘추하고 천한 육체적 한계’ 본능적, 성적 욕망…등’으로 대변되는 부정성이다(수전 보르도, 2003:16). 일례로 영화나 TV 멜로드라마를 통해서도 젠더화된 이원론의 속성이 제도와 문화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기 있는 멜로드라마의 전형적인 여성상은 성적인 유혹을 하는 인물이거나 주인공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악녀이다. 남성의 성적 욕망이 분출된 것은 여성이 유혹한 결과이기에 남성의 잘못이 아닌 전적으로 여성의 잘못이다. 또한 ‘거식증’과 같은 식이장애가 여성에게 편중되는 현실은 여성에게 식욕 억제와 조절을 요구하는 사회문화적 환경과 관련이 있다.
몸에 대한 여성주의적 접근은 일차적으로 이원론의 도식이 남성과 여성의 몸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토대가 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스콧과 모건(Sue Scott, David Morgan)에 따르면 몸은 권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폭력은 여전히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서 여성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곤 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한 억압, 특히 남성, 국가 및 국가 기관이 여성의 몸을 통제하기 위해 권력과 힘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의식을 높이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그 출발점은 1960년대에 등장한 제2차 여성주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산아제한과 낙태권 관련 이슈들을 정치적 의제로 설정함으로써 여성들이 남성의 지배와 학대로부터 자신들의 몸을 통제할 권리를 되찾기 위해 여성의 몸에 대한 지식과 통제를 증진시키는 데 힘을 모았다(Sue Scott& David Morgan, 2005:10; 쉴링, 2006; 57). 이후 여성주의자들은 성별에 따른 차별적인 사회화, 출산과 가사노동, 가정폭력, 강간과 성적 학대, 의료 개입, 직장에서의 착취와 괴롭힘, 광고와 포르노, 매매춘 및 대리모에 나타난 여성 신체의 상품화 등을 통해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통제와 착취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여성주의 몸 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학자로는 주디스 버틀러, 엘리자베스 그로츠와 그리고 수전 보르도 등을 거론할 수 있다.
1990년, 『젠더트러블』을 통해 ‘젠더 수행성’의 개념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진 주디스 버틀러는 여성/남성이라는 성별 이원론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성별 이원론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고, 이를 반복적으로 수행한 결과이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섹스와 젠더, 섹슈얼리티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는 사회적 구성물일 뿐이다. 젠더 정체성 또한 사회적으로 규범화된 것을 수용, 체화한 결과이다. 즉 사회가 여성다움 또는 남성다움의 규범을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도록 강조하는 것은 젠더 규범을 통제함으로써 이성애 질서를 공고화하는 방법 중 하나이며, 여성 억압의 요인이 되는 것이다. 여성 억압을 해체하는 것은 바로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해체하는 것이다.
버틀러는 초기 저서에서부터 줄곧 몸에 대한 관심을 표현해왔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핵심적인 문제로 몸에 초점을 맞춘 것은 후기저작들이라고 할 수 있다. 2004년 출간된 『위태로운 삶』을 기점으로 『전쟁의 프레임들』(2009),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2020) 등의 후기 저작들을 통해 그는 전통적인 존재론을 해체하면서 새로운 “몸의 사회적” 존재론, 즉 몸을 통해 우리는 사회적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결국 버틀러에게 몸이란 경계가 있는 실체라기보다는 사회적 공간 내에서 타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나’라는 자아를 만들어갈 수 있는 장이다. 따라서 몸은 항상 사회적 규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조직이나 환경적 요인과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 양식을 지닌다. 그 존재양식에는 그가 명명한 몸의 취약성, 열림, 상호 얽힘 및 의존성, 저항성이 포함된다(정혜욱, 2024: 170).
몸 페미니즘(Corporeal Feminism)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엘리자베스 그로츠도 여성주의와 몸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대표적인 학자로, 뤼스 이리가라이, 주디스 버틀러와 함께 몸 페미니즘 이론을 이끌고 있는 인물이다. 그로츠의 이론적 관심은 (1) 이원론을 비판하는 동시에 일원론에 도전하면서 몸의 ‘물질성’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고, (2) 주체의 육체성(corporeality) 개념을 중심으로 성차(性差)를 풀어내면서 여성의 관점에서 몸을 재형상화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이는 그의 1989년에 출판된 첫 저서, 『성의 전복 (Sexual Subversions)』이나 『변화무쌍한 몸들: 몸 페미니즘을 향하여 (Volatile Bodies: corporeal Feminism)』(1994), 『공간과 시간 및 도착 (Space, Time and Perversion)』(1995)에서 잘 드러난다.
국내에 2001년 『뫼비우스 띠로서의 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가 2017년에 『몸 페미니즘을 향하여: 변화무쌍한 몸』으로 재번역된 1994년의 『Volatile Bodies:corporeal Feminism』을 통해 그로츠는 데카르트식의 이원론을 비판하면서 몸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산물임을 강조한다. 그로츠는 남성/여성의 구분은 마음/몸의 이항대립과 결탁해왔다고 주장한다. 즉 마음은 남성적인 것으로, 몸은 여성적인 것으로 등치되면서 여성의 몸은 남성에 비해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덧씌워져왔다고 보는 것이다. 나아가 성별에 따른 몸들은 성차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모델에 입각해 분석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차를 간과한 보편적 인간이라는 모델은 각각이 지니고 있는 성의 특성을 중화시킴으로써 여성적 차이를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로츠가 여성과 남성의 몸에 대한 분석은 성적 차이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동일성의 틀로 총체화시키는 보편주의와 남근중심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이현재, 2009: 130; 임인숙, 2001:187).
수전 보르도와 발트라우트 포슈는 소비문화 속에서 여성이 ‘몸과의 투쟁’ 상황으로 내몰리는 현상을 고찰한다. 보르도의 저서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과 포슈의 『몸 숭배와 광기』는 제목만으로도 오늘날 날씬하고 아름다운 몸을 위해 몸을 돌보고 관리해야 한다는 강박이 신을 숭배하는, 그야말로 광기에 가까운 행위가 되었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외모에 대한 평가는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가혹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체중과 주름에 맞서 전쟁을 벌여야 하고, 성형 수술이나 치장에 몰두해야 하는 등 아름다움을 위한 고통의 나락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이는 미용 산업, 권력관계, 몸이 자본이 되는 메커니즘에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인 것이다(보르도, 2003; 포슈, 2004; 김남옥, 2012: 311).
여성의 몸과 관련한 최근의 이슈 중 하나는 대리모 산업과 대리모로 만들어진 가족의 문제이다. 2009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구글베이비』 는 미국에 본사를 두고 일은 개발도상국에 하청을 주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빈곤국의 대리모를 통해 출산하여 거래하는 대리모산업을 다루고 있다. 실제로 매년 대리모를 통해 태어나는 아이들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세계적인 축구스타 호날두와 여러 유명인들이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얻은 사실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혹실드는 대리모 활동을 하는 개발도상국 여성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임대자궁과 대리모’들의 이야기를 소개한 바 있다. 혹실드가 강조한 바와 같이 우리는 정자, 난자, 자궁 등 몸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아웃소싱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앨리 러셀 혹실드, 2013). 아직 이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상황이지만, 가난한 여성들의 몸을 착취하는 문제로 볼 것인지 그들 자신이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의 행사로 볼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영화, 『스플라이스』(2010)4)와 『원더랜드』(2024)5)는 영화적 상상력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전자는 과학자 커플에 의해 인간(과학자 커플)의 유전자와 조류, 양서류, 파충류, 갑각류 등 다종(多種)의 유전자로 탄생한 키메라를 다루고 있다. 이는 이미 시작된 “바이오테크 시대”의 기술적 수준에 대한 성찰과 그것으로 야기될 수도 있는 인류의 두려움에 대한 계보를 잇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김남옥, 2011: 89). 후자는 2024년 6월에 개봉한 한국영화로 죽은 연인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하는 서비스를 통해 ‘산자와 죽은 자의 재회’를 담고 있다. 이는 SF라기보다는 이미 현실이 된 이야기이다. 알파고 쇼크6) 이후 인공지능 붐이 일어나면서 죽은 자를 ‘환생’시켜 산 자와 죽은 자가 해후하도록 하는 일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2013년 개봉한 <Her>는 이들과 같은 듯 결이 다소 다르다. 인간이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영화는 기술의 진보를 다루고 있으나, 생물적인 몸과 몸의 합성도, 죽은 자와 산자의 만남도 아닌 인간과 기계의 정서적 교류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상상이 일상이 된 사건들은 그 외에도 많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인공지능 로봇 소피아는 최초로 UN에 진출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시민권을 획득했고, 인간 모델을 대체한 광고모델 등 인공지능 인플루언서들이 속속 등장해 활동하고 있다.
첨단 기술과 몸에 대한 연구는 주로 역사상 처음 대면하게 되는 기술의 혁명성과 몸의 관계, 사이보그 및 포스트휴먼 담론, 그리고 생명정치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는 정보통신기술, 생명공학기술, 나노기술 등과 같은 첨단기술들이 획기적인 질적 도약을 이루었고, ‘악마의 호출, 판도라의 상자, 특이점, 파국, 인류의 종말’ 같은 논란의 진원지로 등장한 인공지능기술이 급진화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김남옥, 2022:54).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일찌기 기술발전 속도가 가속되고 기술의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전제로 인간의 생활이 되돌릴 수 없도록 변화되는 ‘특이점’이 오고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특이점의 동력은 G.N.R(Genetic, Nanotechnology, Robotics)이라는 세 가지를 중심으로 중첩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혁명들이다. 즉 정보와 유전공학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혁명은 생명이 간직한 정보처리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인간 신체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고, 나노기술 혁명은 우리 몸과 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분자 수준으로 재설계하고 재조립할 수 있게 해줄 것이며, 가장 강력한 혁명으로 꼽히는 로봇공학은 인간수준의 인간지능을 넘어서는 로봇을 등장시켜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을 것이란 전망인 것이다(레이 커즈와일, 2007). 현대의 핵심기술들의 혁명적인 힘을 강조하는 것은 커즈와일만이 아니다. 마누엘 카스텔과 토머스 휴즈 외에도 많은 학자들은 오늘날 혁명적인 첨단기술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였고, 기술간 내파와 융합, 응용기술들의 확산되면서 우리의 삶의 조건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첨단기술들이 향하는 곳은 곧 우리의 신체 내부라는 사실이다.
폴 비릴리오는 오늘날을 이식혁명의 시대로 규정한다. 최첨단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다른 생명체의 기관과 교환하는 이종이식, 몸 일부분을 마이크로 기계로 대체하는 테크노 이식이 가능해진 것이다. 비릴리오는 ‘새로운 우생학 시대’라는 비판적 입장에서 공학 기술이 우리 신체에 난입하여 수행한 혁명이 이식혁명이고, 이는 곧 기술에 의해 인간 신체 내부가 식민화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폴 비릴리오, 2007).
이미 오래 전부터 영토의 지리적 범위와 지구의 지층에 대한 개발에 기여한 후, 과학과 테크노 과학의 최근의 발전은 인간이라는 동물 기관과 내장의 점진적인 개발에 이르렀다. …중략… 사실 오늘날 최첨단 기술의 현장은 지구나 우주의 환경의 무한대의 무한이라기보다는 인간 기관들의 생명체를 구성하는 내장과 세포들의 무한소의 무한이다(비릴리오, 2007: 125~126).
위르겐 하버마스 또한 공학적 기술에 의해 인간의 몸이 재구성되는, 즉 “인간이라는 자연의 기술화”에 비판적인 입장이다. 인간 몸에 대한 첨단 기술의 개입은 적극적인 우생학적 전개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주목하는 것은 대리모, 익명의 정자기증, 난자 기능, 냉동 난자세포의 무차별적 차후 사용, 착상전 유전자 검사 등이다. 이는 인격체가 되기 이전에 자신이 공학적으로 프로그래밍 되어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자기의식이나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게 될 수 있는데, 이는 윤리적으로 자유롭고 도덕적으로 평등한 규범을 해치는 일이다(위르겐 하버마스, 2003).
최첨단 기술에 의해 우리 신체가 기계화와 융합되고, 유전자의 조작과 합성, 나아가 창조되는 현상에 대해 낙관론적 전망을 하든, 아니면 비관론적 입장을 견지하든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기계와 결합하고, 유전자를 혼합해 배양하고, 잘라내고 이식하고 복제하기에 이른 기술적 수준을 고려할 때 미래는 현생 인류와는 다른 종의 인간이 등장할 것이라는 전망인 것이다(김남옥, 2013: 258). 이에 본격화된 것이 포스트휴먼 담론이다. 포스트휴먼론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N. 캐서린 헤일즈(N. Katherine Hayles),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 닉 보스트롬(Nick Bostrom),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 캐빈 워릭(Kevin Warwick) 등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휴먼은 사이보그에서부터 한스 모라벡이 예견한 바와 같이, 더 이상 몸의 실체를 갖지 않고 컴퓨터에 정신이 업로드되어 저장된 정보로만 존재하거나 인지,사고 행위능력을 갖춘 인공지능이나 로봇 등에 이르기까지 그 범주는 매우 넓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포스트휴먼은 다양한 비인간적 존재자들과 교류하는, 인간-비인간의 복합체로 정의할 수 있다 (김문조, 2022: 17). 그러나 이에 대한 시각은 분명하게 나뉜다. 한편으로는 포스트휴먼을 공포로 받아들이는 쪽이다. 포스트휴먼은 비인간화되는 것이고, 이는 인류에게 해가 된다는 입장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신체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수명을 연장하거나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에게 기술과 인간의 융합은 인간 진화의 새로운 단계인 것이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는 첨단기술을 활용해 몸을 끊임없이 수정, 개조, 변경, 설정, 증강, (재)창조하는 포스트휴먼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더 이상 우리 몸이 고정적이고 자연적인 실체가 아니라, 정보를 발생시키고 분석되고 처리되며, 통제․해체․조립 창조할 수 있는 원료의 창고로 간주되고 있음을 말해준다(김남옥, 2014: 260). 이는 생명정치(biopolitic) 담론을 재활성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실제로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혈액이나 유전자, 조직 등이 광물처럼 추출되어 잉여가치의 원료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카우시크 순데르 라잔(Kaushik Sunder Rajan)은 게놈 이후 생명이 발명의 대상이 되었음을 강조한다. 인간의 유전자, 세포계, 조직, 그리고 기관은 물론 인간의 배와 태아도 특허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라잔, 2012). 이제 유전자는 물화되고 있으며, 가치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니콜라스 로즈(Nikolas Rose) 또한 생명과학의 발전하면서 의료의 변화가 우리의 삶을 바꾸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오랫동안 인간이 정치적 삶을 영위하는 존재였으나, 오늘날에는 정치가 인간의 생명 자체가 문제 삼고 있다고 주장한다. 곧 생명 그 자체가 정치의 주된 주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역시 오늘날 생명을 일종의 잉여가치를 포함한 것으로 또 기술화를 통해 추출할 수 있는 잠재적 가치를 가진 원료로 간주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몸은 자본화하고 거래하고 저장 할 수 있고, 전지구적 생명경제에서 그것을 상품으로 거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Nikolas Rose,2007). 그 외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등도 생명정치 논의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인물들이다.
Ⅴ. ‘몸의 사회학’의 확장을 위하여
몸은 사회를 읽는 수많은 통로 중의 하나이다. 누구나 태어나서 몸으로 사회 속에서 살아가다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 몸의 체현방식이 다르고, 계급, 성별, 인종, 연령에 따라 몸에 부여되는 가치 또한 상이하다. 또한 몸을 통해 사회적 관계의 경험이나 문화적 체현,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이 구현되기도 하며, 기술 및 사회 변화에 따라 자아정체성과 죽음의 방식과 가치도 달리진다. 이러한 발견은 몸을 사회학의 핵심 주제로 떠오르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고, 각종 의례, 다이어트, 성형, 몸만들기, 장기이식, 사이보그, 생명복제, 포스트휴먼 등 다양한 주제로 탐구 영역을 확장 발전시켜왔음은 매우 큰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몸의 사회학적 연구가 특정한 의제들로 한정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지금까지 연구되어온 의제들 외에도 상호 중첩되면서도 중요한 주제들이 존재한다. 몸의 사회학의 확장을 위한 새로운 과제가 여전히 존재하기에 몸의 사회학의 지형에서 여백으로 남아있는 주제가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해 본고는 몸의 사회학적 이론화에 주목하면서 우선적으로 몸에 대한 주요 접근 방법-자연주의적 관점과 사회구성주의적 관점, 그리고 현상학적 관점 및 주요 이론가들을 검토하였다. 결과, 몸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에서 요구되는 것은 생물학적인 몸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살아있는 몸의 살아있는 경험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하겠다. 다음으로는 지금까지 몸의 사회학에 중요한 테제로 삼은 의제들을 분류한 후 각각에 해당하는 이론들을 탐구하였다. 다양한 분류가 있을 수 있겠으나, 탐구 결과 (1) 사회적 통제와 몸, (2) 소비문화와 몸, (3) 젠더와 몸, (4) 첨단기술과 몸(포스트휴먼담론) 등으로 분류되는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자원이라 할 수 있다. 정치화된 몸, 젊고 아름다운 몸만이 가치 있게 평가하는 소비문화, 젠더에 따라 차별적으로 부여되는 몸의 가치, 혁명적인 발달로 인해 야기된 불확실성, 포스트휴먼 담론 등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고, 이 네 꼭지점을 중층적으로 오가는 교차성 연구에 매우 유용한 자원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 신체자본, 젠더불평등, 테크노사이언스 의제가 교차하는 중요한 주제들이 여백으로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령(노화), 인종, 죽음, 장애…등이 그것이다. 특히 개인이 생애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질병과 장애, 노화와 죽음은 몸의 사회학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야 할 의제들이다. 인간은 몸으로 존재하고 몸으로 살아가며 장애 또는 질병을 경험하기도 하며 노화를 겪고 죽음과 더불어 살아 있는 몸에 안녕을 고하게 되기 때문이다. 몸의 사회학이야말로 이 의제들을 본격화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지금까지의 검토에서 우리의 몸이 정치적 투쟁과 사회적 불평등이 체현되어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게 드러났다. 즉 몸은 신체자본의 원천이며 문화자본이나 경제자본 등으로 전환될 수 있으며 가부장적 구조를 유지하거나 첨단 기술과 시술을 통해 권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네틀턴, 2018: 174). 병든 몸, 노인의 몸, 장애인의 몸, 죽어가는 몸에 대한 연구는 결국 몸의 사회학에서 주로 다루어온 이 네 가지 의제들과 중첩적으로 얽혀 있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몸의 사회학은 장애, 질병, 노화, 죽음과 같은 생활세계의 의제를 본격적으로 담아낼 때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지도가 그려질 것이라 본다.